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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서부권역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필요해
김희태 문화재 전문기자 | 승인 2023.12.29 11:47

최근 백만 인구를 돌파한 화성은 동부권역과 서부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실상 화성시의 전신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서부권역으로, 이 중 핵심적인 장소는 서신면과 남양읍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화성시는 삼국시대에 당성군(唐城郡)으로 불렸는데, 이와 관련한 핵심적인 장소가 당항성(唐項城) 즉, 지금의 화성 당성이다.

화성 당성. 삼국 항쟁 시기 신라의 당항성(唐城郡)으로, 과거 이 지역은 당성군(唐城郡)으로 불렸다.

이후 신라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충선왕 때는 남양부(南陽府)로 불렸다. 그러다 태종 때인 1413년 도호부가 되었으며, 이후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에 따라 수원군과 남양군이 합쳐져 수원군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 1949년 수원시가 만들어지면서 나머지 잔여 지역이 지금의 화성시가 되었다.

즉, 지금의 화성시 동부권역은 조선시대만 해도 수원부에 속해 있던 지역인 점을 고려해 보면 화성시의 근본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서부권역으로, 이 중 삼국시대의 핵심 장소는 화성 당성이 소재한 서신면이며, 고려와 조선시대의 핵심 장소는 지금의 남양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성 당성과 남양읍은 화성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남양(南陽)의 지명 유래 흔적으로 주목되는 용백사(龍栢祠)

현재 화성시청이 있는 남양읍은 충선왕 때 남양부로 명칭이 변경된 이래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 바로 남양도호부의 관아다. 현 남양초등학교와 보훈회관 일대를 중심으로, 남양도호부의 관아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아 건물이었던 남양 풍화당(風化堂)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 밖에 관아의 흔적은 남양초등학교 내 용지(龍池)와 와룡루(臥龍樓) 현판 등이 남아있으며, 함께 주목해 볼 문화유산으로는 윤계 선생 순절비와 남양읍행정복지센터에 있는 남양도호부 선정비 등이 있다.

남양 풍화당. 남양도호부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남양도호부 선정비

그런데 이러한 남양(南陽)의 지명 유래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장소가 있는데, 바로 용백사(龍栢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양도호부 편을 보면 용백사는 병오년인 1666년(현종 7)에 세워졌으며, 기유년인 1669년(현종 10)에 사액을 받았는데, 촉한의 승상인 제갈량(漢諸葛亮)의 사당이다. 향유(鄕儒, 시골의 선비)들에 의해 세워진 용백사에는 제갈양을 비롯해 송나라의 명신인 호안국(宋胡安國), 윤계 선생 등을 향사했는데, 영조와 정조가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다.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 용백사는 1725년에 제작된 <남양부지도>와 1899년 <남양군읍지>에 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용백사의 위치는 과거 역골로, 와룡동(臥龍洞)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남양의 동남쪽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가평 조종암. 병자호란 이후 숭명반청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제갈양의 사당인 용백사가 조선에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성리학자들에 의한 제갈량의 숭배를 빼놓을 수 없다. 성리학이 들어오기 시작한 고려 말과 조선 전기에도 제갈양에 대한 숭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대외환경과 함께 정치적 고려로 더욱 확산되었다. 대외적인 환경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참전한 것과 함께,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해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명분적으로 이를 극복할 대상이 필요했다.

때문에 효종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북벌이 하나의 상징처럼 나타났고, 이는 삼국(위·촉·오) 중 가장 약체였지만, 명분적으로 망해버린 한의 뒤를 이은 촉한정통론의 영향과 북벌을 도모한 상징으로서 제갈량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즉, 당대의 숭명반청 의식과 망해버린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중화를 이어야 한다는 소중화의 흐름 속에서 제갈량에 대한 숭배는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평안도 영유현의 와룡사(臥龍祠)를 비롯해, 남양의 용백사 등 제갈량의 사당이 만들어졌다.

와룡루(臥龍樓) 현판

특히, 용백사의 존재는 남양의 지명 유래와도 관련이 있는데, 남양은 유비가 제갈량을 찾았던 삼고초려(三顧草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양의 지명 유래와 관련해서도 제갈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를 보여주듯 남양도호부 관아 건물 동헌 앞쪽에 와룡루가 있었는데, 와룡(臥龍)은 제갈량의 호다. 따라서 용백사의 존재는 남양의 지명과 제갈량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흔적이기에 주목해 볼 장소인 것이다.

■ 남양, 문화의 길을 만들어야

이러한 남양도호부의 치소였던 남양읍은 택지 개발 이후 그 모습이 많이 변했다. 지금은 옛 남양도호부의 흔적이 일부 파편처럼 남아있을 뿐, 연결고리는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따라서 이러한 파편들을 연결하는 문화의 길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가령 남양도호부 관아를 예로 들면 현시점에서의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분으로, 각 관아 건물의 위치에 표지석을 설치해 기능과 역사성을 알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관아의 경우 옥사 터는 인근에 있는 남양성모성지와 연결될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사례로, 안성 죽산성지의 경우 인근 죽산면사무소에 죽산 관아 옥 터와 관련한 조형물과 표석을 설치한 바 있다.

서백호 효자비

한편, 남양 풍화당의 경우 그 기능 가운데 효행과 선행의 장려가 있는데, 남양읍행정복지센터에 있는 서백호 효자비가 이를 잘 보여준다. 풍화당에서는 1921년 7월에 서백호에 대한 효행 표창식을 거행되었고, 1922년 5월 효자비의 제막식이 있었다. 따라서 서백호 효자비는 풍화당의 기능과 관련한 장소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 남양도호부 선정비와 윤계 선생 순절비 등 관아와 관련이 있는 문화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남양향교 대성전

이와 함께 관아와 함께 주목해 볼 장소로 3단 1묘가 있는데, 보통 지방의 경우 3단인 성황단과 여단, 사직단이 있고, 1묘는 보통 향교를 이야기한다. 과거와는 위치가 달라지긴 했지만 현재 남양향교가 남아있기에 이 부분의 활용도 중요하며, 나머지 3단의 위치도 파악한 뒤 표지석 설치 등을 통해 남양도호부의 역사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지난 19일(화) 남양도서관에서 송옥주 의원실의 주관으로 열렸던 <화성 서부권역 문화유산 보존과 활용방안 정책토론회>가 주목된다. 이번 토론회를 시작으로, 그동안 동부지역에 비해 소외된 서부권역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 첫걸음을 내딛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김희태 문화재 전문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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