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멍하다.
사물이 흐려 보인다.
내가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습관처럼 서둘러 몸을 낮추고 패인 웅덩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래야만 산다고 몸이 배워버린 동작이다. 풀뿌리를 잡고 기어가는 손등에는 피가 배어 있다.
‘젠장!’ 눈물이 난다. 나는 군인도 아닌데 총을 들고 전쟁의 한 복판에 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도 모른다.
적군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딱히 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적군은 나이 40이 되도록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이다. 그런데 그들은 까다로운 상대다. 도시에서의 전투는 확실히 우리가 우위 이었지만 계곡에서의 전투는 그들이 한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이라 협곡을 적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자이라 협곡은 도시와 도시를 있는 깊은 계곡이자 과거에는 도시 사람들을 넉넉하게 받아주었던 거대한 쉼터 이었다. 자이라 협곡을 얻지 못하면 우리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기 때문에 협곡을 사수해야만 했다.
숲을 전쟁터로 활용하는 적군은 자이라 협곡에서 두 달째 물러나지 않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은 나는 담배를 물었다. 담배에서 피 맛이 난다. 담배연기가 내 위치를 노출 시킬 염려는 없다. 적군이 쏜 포화의 연기에 비하면 담배연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담배를 물고 내가 가지고 온 총을 살펴보았다. 노리쇠를 뒤로 당겨 장전을 해 보았다. 흙투성이 자동소총이지만 작동은 잘된다. 가물가물 하지만 총 쏘는 법을 군대에서 배웠던 기억이 이렇게 유용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탄약은 지천에 널렸다. 죽은 동료의 탄띠를 가져다가 쓰면 그만이다.
좀 전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은 후 적들은 잠잠한 편이다. 자이라 협곡의 어디쯤에가 그들의 본거지가 있을 법도 한데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다. 분명 어디엔가는 그들의 본거지가 있을 것이다.
자이라 협곡은 S자 형태를 이루는 20여 km의 깊은 계곡이다. 우리는 협곡의 중심부까지 전진해 고지를 만들었다. 군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라 엉성하기는 했어도 자이라 협곡의 구석구석을 잘 아는 시민들이기에 군대보다 더 잘 싸운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웃긴 것은 단 한명의 20대도 없다는 것이 이 부대의 슬픔이다.
20대의 청년도 보호 받아야 하는 아이들에 속한다. 결국 전쟁 통에 모든 직장이 스톱하자 직장에 나가야 할 30대와 40대가 동원 됐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산책길이 지금은 전쟁터가 됐고 나는 지금 그곳에 엎드려 총을 겨누고 있다.
400여명의 시민군이 자이라 협곡의 중심부를 세 겹으로 방어 하고 있다. 협곡의 중심부에는 옛날부터 사용되던 약수터가 중간 중간에 잇기 때문에 식수 조달에는 큰 문제가 없을 듯 했지만 오산이었다. 사방에 핏물이 흘러 약수에 흘러들어갔는지 약수를 이용할 수 없었다. 목이 타들어 간다.
담배를 비벼 끄고 전방을 다시 살펴보았다.
고요하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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