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우 ‘한국인문사회연구회’ 사무국장. ⓒ김태우

마르셀은 한밤중 어둠 속에서 깨어나 '기적(汽笛) 소리'와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모금'을 통해 이젠 잊어버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너무나 흔한 소리와 향기에 이끌려 따라간 시간 속에는 작은 마을과 가족이 있고, 한 소년의 두근거리는 꿈과 설렘으로 남아있는 그녀가 있다. 권태나 무력감에서 마르셀을 위로해 준 알 수 없는 기쁨과 환상이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프루스트의 소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서울; 민음사, 2012)에 대한 이야기다. 조용필이 20세기에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다. 어제 내가 썼으며 오늘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소재는 잊어버린 기억記憶이다. "김 작가의 일상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는 이 글 전체가 어쩌면 모두 잊어버린 기억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어쩌다 마주친 영영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런데 아주 사소한 물건이나 소소한 사건이나 작은 감각 때문에 떠오르게 된, 결코 사소하지 않은 기억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거나 피식 작은 웃음을 흘린 사람, 바로 당신과 나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살아있다면 과거가 있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가 있으며, 한 치 앞도 만질 수 없는 미래가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실타래는 절대 만질 수 없는 기억이다. 이미 만들어진 기억을 통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누구여야 하는지 가치를 가진 의미의 인간을 만든다. 그 기억은 낡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마치 지금 막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生生한 날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당신과 내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다시 살아난 기억은 때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으며 공동묘지에 쓸쓸한 묘비로 남은 가족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가슴에 묻은 자식에 대한 일화일 수도 있고, 어느 봄날 오후 느티나무 이파리 사이로 살짝살짝 비추던 햇빛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잊혀진 기억이 떠오르는 그 순간, 당신의 입술은 미소를 짓거나 통곡을 한다. 때론 주체하기 힘든 분노와 그리움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하지만 다시 떠오른 당신의 기억은 당신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 기억은 당신을 잘 살게 하거나 못살게 굴 것이다. 나와 당신이 떠올린 기억은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기억을 받아들이고 떠올리는 사람(人)은 자신만의 무늬(文, 紋)를 만든다.

사람들은 무늬를 만들며 살아간다. 때로 그 무늬는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할 때도 있다. 복잡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단순한 것일 때도 있다. 자신만의 예쁜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남들 따라 하기 급급해 뾰족한 바늘이 손가락을 찔려 피가 날 때도 있다. 무늬에 남은 한 방울의 피까지 무늬를 만든다.

나는 아직 완벽한 무늬를 본 적이 없다. 만약 완벽한 무늬가 있다고 해도 난 로티(R. Rorty)의 표현처럼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말할 뿐”이라 말하련다. 기억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입술로 기억을 말할 뿐이다. 삶의 무늬, 혹은 인간의 무늬(人文)란, 혹은 삶의 무늬를 배우고 익힌다는 뜻의 인문학은 더는 당위성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잊어버린 기억이 고통스러운 것이든 혹은 썩은 내가 나는 것이든 그 무늬를 만들 사람은 나와 당신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무늬이며, 또 각자 만들어야 할 무늬다.

기억이 스스로 말하게 하지 말고 당신만의 멋진 무늬, 아름다운 무늬, 사람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본을 보여줄 수 있는, 행복한 무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오산에서, 대한민국에서, 지구라는 멋진 신세계에서.

김태우  한국인문사회연구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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