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에 도통 시간을 내지 못하는 신랑을 대신해 배우자 명의로 통장을 개설했다. 비상금을 모아두는 용도로 쓸 거라고 개설 목적을 밝히고, 가족관계증명서류와 신분증 등을 제출하니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대신 직원은 요즘 워낙 대포통장 등 범죄에 이용되는 일이 많아 입금만 가능하도록 처리했다고 말했다. 본인이 직접 방문을 해야 출금 제한을 풀 수 있다고. 그러려니 했다.

몇 달 후, 신랑이 직접 다른 지점을 방문해 출금을 하러 갔다. 그런데 개설은행과는 다른 답이 담당자로부터 돌아왔다. 출금 불가. 애초부터 만들 수 없는 통장을 개설했기 때문이란다. 비상금 목적으로 통장을 개설한다는 자체가 입증이 안 된다고 한다. 만들어준 지점 직원이 업무 처리를 잘못한 거라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본인 통장인데, 돈을 뽑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신랑은 당황스러워했다. 방법은 하나. 해지뿐이었다. 방도가 없었다. 그러면서 직원은 앞으로는 차라리 적금을 들라고 했다. 서류 절차가 까다롭지 않단다.

결국 계좌해지와 동시에 전액출금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헌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다. 은행에서 여유자금을 모아 두는 저수지 통장 하나 만들 수 없다니(여기에 필요한 증빙자료를 알려달라고 해도 그런 건 없단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재직 증명서나 근로 계약서를 제출하지 못해 통장개설을 못하는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통장을 개설해 줬다가 대포 통장으로 사용되면 여러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은행업계 직원들이 더욱 몸을 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들을 두 번 울리는 제도 앞에서 한숨만 나왔다. 스마트폰에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정보를 미리 저장해두고 1초 만에 물품을 거래할 수 있는 시대지만, 신분증과 도장만 가져가면 5분 만에 입출금 통장을 만들 수 있었던 시대는 물 건너갔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나는 이와 관련해 묻고 싶었다. “이게 최선입니까?”라고. 정해진 틀과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그게 충족이 되지 않으면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곳이 어디 은행 뿐이겠냐만, 전형적인 관료주의의 폐해가 공직사회를 넘어 은행업계까지 번지는 현상이 달갑지 않아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014년 하반기 5만3942건에 달하던 대포통장 발생 건수는 올해 상반기 2만1555건까지 줄었다고 한다. 성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고객들이 서있는 지점과 은행이 바라보는 차이를 줄이는 일은 실패했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포통장을 모집하는 일이 어려워지자 교묘하게 개인들을 속여 계좌정보를 넘기게끔 하는 범죄는 늘고 있으니. 또한 통장을 만드는 게 어렵다 보니 ‘통장 고시(통장 만들기가 고시에 합격하기처럼 어렵다는 말)’, ‘통장 난민(통장 개설이 쉬운 은행 지점을 찾아다니는 이)’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는 실정이란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6세기에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를 이렇게 짚었다.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나약하게 인지될 수 있다.”

하루빨리 대포통장 규제를 강화하는 초기 시점인 지금부터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잠재적 범죄자를 잡으려다 모든 고객을 다 잃을 수도 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이라도 마련해 줘야 한다. 행정만능의 세계, 규제와 절차에 대한 맹목은 수많은 기회의 문을 차단시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소영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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