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消化)하다’. 일반적으로 섭취한 음식물을 분해해 영양분을 흡수하기 쉬운 형태로 변화시킨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리고 하나 더. 배운 지식이나 기술 따위를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주어진 일을 해결하거나 처리한다는 비유적인 의미도 있다. 나는 이 ‘후자’의 자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예컨대 취재를 나가 기사를 쓸 때 내가 어떠한 현안에 대해 이해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이를 제대로 기사화 할 수 없고, 또 편집장도 금세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항상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즉 소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관공서 기자로 일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곳에서 연설문 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던 분과 ‘글쟁이’로서 갖는 애로사항을 나누곤 했는데, 그분 역시 ‘소화능력’에 대해 공감했다. 때문에 현장에 나가 취재를 하는 쪽은 나였기에, 앉아서 연설문을 쓰는 그 분이 일을 하다 막히면 분위기를 묻곤 했다. 또 반대로 관공서 수장이 말하는 연설문을 못 알아들었을 땐, 역으로 “이게 맞냐”며 질문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화능력은 저 뿐만 아니라 수장에게도 필요해요. 제가 쓴 연설문을 이해해서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는 건 수장의 몫이니까요.”

그때 알았다. 내가 쓴 글을 읽는 독자나, 연설문을 읽는 수장이나 어느 누구나 소화(消化)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때문에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을 미리 전달받아 수정했다는 사전 검열 의혹은 충격이 컸다.

그리고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그녀가 읽는 연설문에는 연설의 이미지 혹은 제스처가 자아내는 정서적 효과가 느껴지지 않았는지, 곧이곧대로 읽는 것만 같은 지. ‘소화능력’이 배제됐는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연설문을 어찌 활용할 수 있을까.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수장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을 배제한 채 4년 간 집권했다니 현실이 더 소설 같다.

수장이 지닌 강력한 무기는 말이다. 수장의 한마디는 나라 전체를 흥(興)으로, 혹은 망(亡)으로 이끌 수 있다. 위기가 닥치면 구성원들은 모두 그의 입을 바라보고 주목한다. 2차 대전은 연설의 시대였다. 독재자 히틀러는 고비가 닥칠 때마다 현혹하는 놀라운 연설로 군중들을 사로잡았다. 영국 국왕 조지 6세는 언어장애를 극복하면서까지 시련과 고난을 이겨나가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조지 6세의 실화를 담은 영화 톰 후퍼 감독의 영화 <킹스스피치>(2011)에서 제대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라고 말한 대통령의 발언은, 연설은 호소력이 있는가. 설득력이 있는가. 나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하루바삐 그녀가 깨달았으면 한다. 대한민국호를 모는 ‘수장으로서의 소화능력’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이소영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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