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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박문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안성 칠장사(七長寺)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07.15 10:36

종종 특징적인 문화재의 경우 지명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가령 왕릉이 있을 경우 능(陵)이 들어간 지명이 들어간다거나 태실이 있다 해서 태봉산, 태봉리 등의 지명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명에 영향을 미친 문화재는 장소에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서 바라볼 지점으로, 오늘 소개할 안성 칠장사의 경우도 이에 속한다. 칠장사의 유래는 의외로 명부전에 그려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대략의 내용은 혜소국사(惠炤國師)가 7명의 도적을 교화시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칠장사 명부전에 그려진 칠장사의 유래.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교화시키는 장면이다.
칠장사에 자리한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여기에 등장하는 혜소국사는 고려 전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왕실의 왕사와 국사를 지내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혜소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며 입적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혜소국사의 흔적을 보여주듯 칠장사에는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가 남아 있다. 현재 비문과 귀부, 이수 부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데, 명부전의 칠장사 유래 벽화와 함께 주목해볼 문화재다.

■ 장소가 들려주는 두 명의 인물, 궁예와 박문수

다시 앞선 명부전 벽화를 보다 보면 뜻밖의 한 인물을 만날 수 있는데, 후삼국 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궁예다. 흔히 궁예라고 하면 애꾸눈과 미륵을 자처했던 폭군으로 인식하기 쉽다. 궁예의 이러한 면모는 <태조 왕건>에서 잘 묘사되었는데, 당시 사극의 주인공이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이야기가 돌 만큼 나름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궁예의 신분을 알고 나면 더욱 의미심장한데, <삼국사기>를 보면 궁예는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즉 궁예는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경주 헌강왕릉의 전경.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헌강왕의 서자로 소개되고 있다.
칠장사 명부전에 그려진 궁예. 어린 시절 이곳에 머물렀다는 궁예가 활쏘기를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나라에 불길하다는 이유로 궁예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포대기에 담긴 궁예를 밑으로 던지다 눈이 손가락에 찔려 애꾸눈이 되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궁예의 애꾸눈이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여과 없이 노출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부석사에 있던 신라왕의 벽화를 훼손한 것이다. 또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며 신라에 대한 공세적 수위를 높였던 것을 보면 자신을 버린 신라에 철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주 부석사. <삼국사기>에는 부석사에 있던 신라왕의 벽화를 훼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궁예가 신라에 대해 얼마나 큰 적개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칠장사 명부전에 그려진 궁예의 모습
안성 죽주산성. 승려의 삶을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궁예가 처음 의탁했던 곳이 바로 죽주의 도적인 기훤이었다.

이러한 궁예는 죽주(竹州)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궁예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이 칠장사라는 설이 있다. 실제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에는 어린 궁예가 활쏘기 연습을 하는 그림과 함께 비교적 다양한 궁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는 승려로 있던 궁예가 세상을 밖을 나와 의탁했던 곳이 바로 죽주의 도적인 기훤(箕萱)으로, 해당 근거지가 지금의 죽주산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며 백성들 사이에 퍼져있는 미륵신앙을 정치에 활용했는데, 지금도 안성에는 궁예 미륵이라 불리는 미륵불이 남아 있을 만큼 안성과 궁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박문수 합격다리의 전경
박문수가 유과를 바친 나한전의 내부 모습

또한 칠장사에는 박문수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주요 내용은 과거를 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박문수가 잠시 칠장사에 머무를 때 나한전에 유과를 바치게 되고 꿈에 부처가 나타나 과거의 시제를 알려주어 과거에 합격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다. 이를 뭉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고 하는데, 이를 상징하듯 칠장사에는 박문수 합격다리가 자리하고 있다. 다리에는 저마다의 기원을 담은 리본이 빈 공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또한 유과를 바친 나한전과 더불어 시험 때면 많은 이들이 찾는 기도처로 잘 알려진 곳이다.

칠장사 나한전의 전경

때문에 합격다리를 방문하면 마치 팔공산의 갓바위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칠장사와 박문수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야기를 통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죽주(竹州)가 있다는 점으로, 교통로 상의 중요한 요충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박문수가 나한전에 바친 유과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음식으로, 기름과 쌀가루(=찹쌀가루), 꿀 등을 사용했기에 사치스러운 음식에 속했던 것이다.

■ 문화재가 들려주는 역사의 현장, 칠장사를 주목해보자!

이밖에 칠장사는 인목대비(1584~1632)와도 관련이 있는데,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대비는 훗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서궁에 유폐되고 자신의 아들인 영창대군이 살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훗날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대비의 지위를 회복한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로 칠장사를 주목했고, 실제 인목대비가 쓴 친필족자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당간지주가 자리하고 있는데, 가운데 철제 당간이 잘 남아 있다. 보통 사찰에서 당간지주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지탱하던 돌만 남아 있을 뿐 칠장사처럼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사례는 많지가 않다. 때문에 당간지주가 이런 형태로 세워졌고 활용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학습 현장으로 제격인 셈이다.

인목대비의 능. 선조의 목릉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안성 칠장사 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보통 사찰의 배치 구조를 보면 산문(山門)이라고 해서 ‘일주문-금강문-천왕문-불이문’으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이러한 산문은 일직선상으로 이어져 있으며, 사찰마다 형태나 순서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령 완주의 송광사를 예로 들면 ‘일주문-금강문-천왕문-대웅전’이 일직선상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반면 칠장사의 경우 일주문의 직선상에 천왕문이 있는 것이 아닌 3시 방향으로 틀어진 모습을 보이는 점은 이색적이며, 현재 칠장사의 천왕문에는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이 자리하고 있다.

칠장사의 천왕문
천왕문 내부의 소조 사천왕상(좌)
천왕문 내부의 소조 사천왕상(우)

한편 칠장사 대웅전 옆에는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석불입상, 보물 제983호)이 자리하고 있는데, 해당 불상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애초에 칠장사에 있던 불상이 아니었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지금의 죽산리 148-2번지 일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봉업사지에 있던 불상으로, 지금은 봉업사지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봉업사에 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신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당시 크게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전주 경기전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되는 내용으로, 이러한 봉업사지의 흔적을 칠장사 경내에 자리한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웅전 옆에 자리한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
봉업사지 오층석탑과 죽주산성. 옛 봉업사지가 있던 곳은 현재 논으로 변해버린 모습이다.

이처럼 안성 칠장사는 인물과 문화재의 관점에서 봐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또한 옛 죽주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상징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서 바라볼 지점이다. 흔히 알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더라도 모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안성 칠장사의 사례를 통해 장소에 담긴 의미와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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