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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여탕에 가야겠다
이소영 기자 | 승인 2019.11.19 08:19

지난 주말, 1박 2일 일정으로 목포 여행을 떠났다. 전날 꼬박 목포 시내를 돌아다닌 터라 사우나가 갈급했다. 살짝 고단해진 몸을 녹이고 싶었다. ‘한방 사우나’라는 간판을 보자마자 무작정 들어갔다. 사우나 안에서 만난 할머니는 냉온탕을 교차로 드나드는 목욕법을 추천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강원도에서 잠시 살았을 때도 그곳 단골 목욕탕의 유행은 냉탕 온탕 오고 가기였다. 전라도와 강원도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마법은 ‘여자 목욕탕’(이하 ‘여탕’으로 기재)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며 나는 잡념에 빠졌다. 오늘 칼럼은 당시 잡념을 짧게 정리한 글이다.

우선 여탕에는 여성의 ‘몸’이 있다. 뜬금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시기에 따라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몸’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예컨대 어릴 땐 ‘날씬’, ‘퉁퉁’, ‘뚱뚱’으로 몸을 개념화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나니,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인다. 한 어르신의 몸에 문신처럼 남겨진 세로줄의 제왕절개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허리 수술을 했는지, 상처가 짙은 갈색으로 물든 어르신의 등 자국에서도 시선이 잠시 멈춘다. 그런 자국이 있어도 여성은 여성이다. 그리고 그 ‘몸’을 지키기 위한 여러 ‘물건’들도 여탕에서는 볼 수 있다. 실리콘 부항기, 림프를 만져주는 놋그릇, 죽염이나 미용소금 등이 그 예다.

‘몸’에 이어 여탕에는 ‘노동’이 있다. 그곳에는 세신(때 미는) 아줌마, 청소하는 아줌마, 계산대 아줌마 등 여탕에서 일을 하는 여성이 있다. 연령도, 출신도 다양하다. 전에 다녔던 단골 목욕탕에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 세신사와 칠순을 앞두고 일을 그만둔 세신사가 있었다. 반대로 여탕에는 목욕을 하고, 일을 하러 가는 여성이 있다. 전업주부든 워킹맘이든 수많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러 가기 위해 여탕에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

여탕에는 ‘음식’도 있다. 사우나 안에서는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갈 때가 있다. 김장철에는 배추 몇 포기를 샀는지 등의 김장 계획을 들을 수 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나는 배추와 무 가격도 알게 되고, ‘브로콜리 김치’, ‘토마토 김치’ 등 세상엔 별의별 김치가 있다는 걸 여탕에서 배웠다. 그렇게 음식 이야기를 듣게 되면 또 허기가 져서 삶은 달걀을 사 먹는다. 나는 종종 아이스커피를 사 먹는데, 박사 (박카스+사이다), 박포 (박카스+포카리스웨트) 등의 메뉴는 언젠간 도전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탕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다녔던 목욕탕에는 어르신들끼리 계모임을 했고, 나름의 맛집 투어를 하는 듯했다. 가끔씩 야유회도 가주며. 여탕의 언어는 대부분 ‘언니’로 통한다. 이 밖에 여탕에는 다양한 여성의 사연이 오고 간다. (알지 못하는 여성의 기구한 인생까지도).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지음, 동녘)’의 저자는 몸이 아프지 않은데도 비슷한 감정을 겪는 이들을 만났다고 한다. 바로 육아 중이거나 육아를 마치고 다시 취업한 이들이었단다. 몸이 자주 아픈 저자가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서 비슷한 공감대를 느꼈다면, 나는 여탕에서 수많은 여성을 만나며 시대를 넘나드는 공감을 느꼈다. 그래서 내게 묻는 여러 질문들이 여탕 안이기에, 오지랖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탕에는 ‘맘충’이 없다. 아무도 ‘맘충’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이가 없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해 72, 62, 52년생 김지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인이 최근 개봉한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한동안 우울했다고 고백을 해왔다. 그 우울감을 떨쳐낼 자신이 없어서, 영화관에 가지 못하는 게으른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본다. 영화를 본 그날은 꼭 여탕에 가겠노라고.

이소영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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