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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영창대군, 안성 영창대군의 묘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희태 기자 | 승인 2019.11.19 09:26

보통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왕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시각의 중요성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 중기의 왕족인 영창대군을 바라보게 되면 당시의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사례가 된다. 지금이야 외교적인 평가에 대한 우호적인 지분을 확보한 광해군 재평가 여론이 일부 있지만, 과거만 해도 광해군은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폭군으로 단죄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근거 중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바로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이 광해군 폐위의 명분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영창대군을 죽여야 했을까?

■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수 싸움, 8살의 나이로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

우선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의 혈통을 보면 선조와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인목대비, 1584~1632) 소생의 유일한 적자로, 적자 계승을 원칙으로 했던 조선 왕실의 종법질서로 본다면 영창대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적통이었다. 그런데 영창대군이 태어나던 해는 선조의 재위 말기로, 이미 임진왜란을 거치며 선조와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상태인데다 전란을 수습하며 그 지위를 다져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혈통적으로 영창대군이 선조의 적자인 것은 맞지만, 현실적으로 광해군이 아닌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선조의 입장에서는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을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고, 또한 선조가 더 오래 살았을 경우 이런 가능성 자체가 현실이 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안성 영창대군의 묘
가평 태봉리 태실. 영창대군의 태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날 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불과 3살이었다. 현실적으로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래도 영창대군의 안위가 염려됐던 선조는 특별히 신임하던 일곱 명의 신하를 불러 유교(遺敎)를 내려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이를 우리 역사에서는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 부르는데, 바로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허성, 한준겸, 신흠이다. 반대로 광해군이나 북인의 입장에서 보면 영창대군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자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따라서 광해군 시기의 영창대군의 삶은 이미 시작부터 예견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1613년에 발생한 칠서의 옥을 빌미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며 영창대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당시 영창대군은 관직은 빼앗기고, 서인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8살이었다.

■ 광해군의 폐위와 함께 복권된 영창대군과 안성에 위치한 묘

이러한 영창대군의 처분은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길암집>을 보면 당시 곽재우가 광해군에게 소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내용을 요약해보면 8살 아이가 무슨 역모를 아냐면서, 이로 인해 인목왕후가 자살이라도 하면 어쩔 것이냐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또한 대동법의 시행에 큰 공을 세운 김육 역시 잠곡으로 낙향하게 된 계기가 바로 계축옥사였다. 북인들 역시 계축옥사를 어떻게 수습하느냐를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는 등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폐모살제는 훗날 인조반정(1623)의 명분 중 하나로 작용했고, 이러한 명분으로 인조가 집권을 했기에, 인조 때 영창대군의 관직은 다시 회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남 봉국사. 최초 영창대군의 묘는 태평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성 칠장사. 칠장사의 중건은 영창대군과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사찰이었다.
배면에서 바라본 영창대군의 묘

바로 이러한 영창대군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75호)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 24-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애초 영창대군의 묘는 성남 봉국사 인근에 있었는데, 이는 태평동에서 출토된 영창대군의 지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본래 성남 봉국사 인근은 예전부터 조선 왕실의 묘역으로 활용이 되었는데, 실제 숙종의 누이인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를 비롯해 제안대군 등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인근이 개발되면서 영창대군의 묘는 현 위치인 안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옮겨진 안성 영창대군의 묘는 인근의 안성 칠장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바로 칠장사가 중창이 된 계기가 영창대군과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사찰(願堂寺刹)이었던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칠장사에는 인목왕후의 어필 칠언시(보물 제1627호)가 남아 있다.

묘를 기준으로, 좌측에 세워진 문인석과 망주석
묘를 기준으로, 우측에 세워진 문인석과 망주석
안성 영창대군의 묘비. 오래도록 우리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이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영창대군의 군호는 선조가 아닌 광해군 때 받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광해군 때인 1611년 영창대군에 봉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영창대군의 묘는 최초의 장지인 성남 봉국사 인근을 떠나 안성에 자리하고 있지만, 안성 칠장사로 인해 또 다른 인연의 조합을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다. 특히 석물의 경우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묘비에 남아 있는 영창대군의 이름은 우리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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